본다는 것의 의미 (파란불, 렌더링, 미디어 리터러시)
신호등 앞에 서서 "파란불이다"라고 말한 적 있으십니까. 저도 어릴 적엔 어른들이 왜 초록색을 파랗다고 부르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도 똑같이 "파란불 켜졌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본다'고 믿는 것이 사실 얼마나 길들여진 결과인지, 서울 가나아트 한남에서 열리는 구기정 개인전 'Clearview Mechanism'이 그 질문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파란불이라 부르는 순간, 인식은 이미 렌더링된다
어릴 때 저는 신호등 앞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색은 분명 초록에 가까운데, 어른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파란불'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틀린 말을 하는 줄 알았는데, 결국 저도 그 언어를 내면화하고 말았습니다. 이 경험이 사실 '지각(perception)'의 본질을 꿰뚫는 단서였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지각이란 눈이 받아들이는 광학적 신호 그 자체가 아니라, 문화·언어·경험이 개입된 해석의 결과물입니다.
작가 구기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홍익대 커뮤니케이션디자인을 거쳐 스위스 로잔예술대학교(ECAL)에서 사진학 석사과정을 수학한 그는, 우리가 매일 접하는 사진과 영상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전제를 작품으로 풀어냅니다. 전시 제목 'Clearview Mechanism'은 '우리는 어떻게 보게 되는가'라는 물음과 직결됩니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신작 '투명성 시각 장치'는 제가 직접 가서 봤다면 아마 한동안 그 앞을 떠나지 못했을 작품입니다. 투명한 철제 프레임 안에 LED 기판과 CPU, 램 같은 컴퓨터 부품을 렌더링한 이미지가 뒤엉켜 있습니다. 여기서 렌더링(rendering)이란 데이터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시각적 결과물로 변환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컴퓨터 안에 존재하던 숫자 덩어리가 화면 위의 '그림'이 되는 순간이 바로 렌더링입니다.
보통 우리는 화면을 볼 때 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계를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LED에서 나오는 강한 빛 때문에 정작 이미지가 잘 보이지 않는 순간이 생깁니다. 사진을 보러 갔는데 사진을 보여주는 기계가 먼저 시야를 가로막는 상황, 이것이 제가 가장 의미 있다고 느낀 연출입니다. 매개체(medium)가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무언가를 통해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 지각(perception): 감각 정보를 뇌가 해석하는 과정으로, 문화와 언어의 영향을 받음
- 렌더링(rendering): 데이터를 시각적 이미지로 변환하는 과정. 이 변환이 일어나는 순간 원본과의 거리가 생김
- 매개체(medium):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 카메라, 화면, 알고리즘 모두 매개체로 작동함
진짜 정원과 이미지 정원이 겹치는 순간, 미디어 리터러시가 시작된다
전시장 중앙의 '투명성 렌더링 장치'는 제가 기사를 읽으며 가장 오래 머물렀던 대목입니다. 실제 화분에 심긴 식물과, 그 식물을 컴퓨터 데이터로 만든 이미지가 한 공간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관객이 작품 주변을 걸으면 두 식물이 계속 겹쳐 보입니다. 하나는 땅에 뿌리를 내린 생물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생물을 스캔해 만든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 데이터입니다. 포인트 클라우드란 물체 표면의 수많은 좌표값을 3차원 공간에 찍어 만든 디지털 복사본으로, 원본과 닮았지만 원본이 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실물 vs 이미지'를 비교하는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기사를 더 읽고 나서야 이 겹침 자체가 핵심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나 SNS에서 접하는 영상을 보며 '저곳이 그런 곳이구나'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그 이미지는 조명, 필터, 알고리즘 추천이라는 세 겹의 가공을 거친 결과물입니다.
신작 '중첩 풍경'은 이 과정을 더 밀고 나갑니다. 자연을 찍은 사진을 컴퓨터로 변형하고, 일부를 확대해 다시 캡처하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미지 프로세싱(image processing)이란 디지털 이미지를 수학적 연산으로 변형·분석하는 기법인데,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원본 풍경의 흔적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도 작품을 선보인 구기정이 이번에 한층 직관적인 방식으로 이 과정을 시각화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중첩 풍경: 창'은 더 나아갑니다. 가나아트 한남 앞 실제 정원을 찍은 사진을 여러 차례 변형한 뒤 반투명 시트로 만들어, 실제 정원이 보이는 갤러리 창에 붙였습니다. 창밖엔 진짜 정원이 있고, 창에는 그 정원이 기술적으로 변형된 이미지가 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서 있다면, 두 정원 중 어느 쪽이 더 '정원답게' 느껴질까 하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을 것 같습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란 바로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단순히 가짜 뉴스를 구별하는 기술이 아니라,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어떤 장치와 프레임을 통해 만들어졌는지를 인식하는 태도 전체를 포함합니다.
미디어 연구자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는 명제를 남겼습니다. 전달되는 내용보다 전달하는 도구 자체가 인식을 형성한다는 뜻입니다. 구기정의 작업은 이 명제를 2일날 디지털 환경에서 다시 입증하고 있다고 봅니다. 제 경우엔 SNS 피드를 보다가 문득 '이건 알고리즘이 골라준 세상이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 비슷한 감각을 느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구기정 개인전 'Clearview Mechanism' 전시 기간과 장소가 어떻게 됩니까?
A. 서울 용산구 가나아트 한남에서 전시는 25일까지 열립니다. 정확한 종료일과 관람 시간은 가나아트 공식 채널에서 확인하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전시 일정은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 전에 꼭 한 번 확인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Q. 신호등이 초록색인데 왜 파란불이라고 부르는 겁니까?
A. 역사적으로 한국어에서는 초록과 파랑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는 언어 관습이 있었습니다. '파랗다'는 표현이 초록빛 자연물에도 광범위하게 쓰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언어는 색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범주로 인식을 분류합니다. 구기정 작가가 어릴 적 이 경험에서 '보는 법'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Q. 미디어 리터러시를 일상에서 어떻게 키울 수 있습니까?
A. 가장 쉬운 출발점은 '이 이미지는 누가,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가'를 습관적으로 묻는 것입니다. SNS 사진 한 장도 필터·구도·알고리즘 추천이라는 선택의 결과물입니다. 제가 직접 해봤는데, 하루에 한 번만 이 질문을 던져도 정보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Q. 렌더링된 이미지와 실제 사진은 어떻게 다릅니까?
A. 사진은 빛이 렌즈와 센서를 통과한 결과물이고, 렌더링 이미지는 수치 데이터를 시각화한 결과물입니다. 둘 다 원본 현실을 그대로 담지는 않습니다. 카메라도, 렌더링 소프트웨어도 결국은 현실을 '해석'하는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식이 더 '진짜'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결론
파란불 이야기를 처음 꺼낸 건 작가였지만, 그 질문은 결국 저 자신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매일 수십 개의 사진과 영상을 소비하면서 저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제 경험상 그 습관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건 불편한 일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구기정의 작업이 요구하는 것은 거창한 철학 지식이 아닙니다. 화면을 보는 순간, 그 화면 뒤에 있는 장치와 과정을 한 번이라도 떠올리는 태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시작이라고 봅니다. 가나아트 한남에 들를 기회가 생긴다면, 창에 붙은 이미지와 창밖의 실제 정원을 나란히 바라보며 그 질문을 직접 느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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